♣광야의 외침!

[스크랩] 아리랑 찬송가론의 인문과학적 논거들

생수의 강 2015. 12. 3. 18:49

아리랑 찬송가론의 인문과학적 논거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시원과 그 기원을 함께 한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다!



유석근 목사

(알이랑코리아 대표, 알이랑교회 담임)

 


  필자는 저서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러므로 아리랑 찬송가론을 부정하려면 그러한 결론을 도출한 논증에 오류가 있는지를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른 순서다. 유석근 목사가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의 어원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느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단순한 정치세력(민족, 국가)이 아닌 ‘종교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고서(古書) 가운데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알이랑 => 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겨레가 원래의 가사를 상실한 것!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가사부터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원래의 노랫말을 복원해야 한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해석하는 열쇠 ‘연음법칙’


  왜 본래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음절의 연결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책이→채기” “낮에→나제”

“벗이랑→버시랑” “가물어”→“가무러” “하늘이→하느리”


알이랑 → 아리랑 /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리요”가 아닌

“아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리랑 연구가도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한 적이 없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이랑’은 ‘알’이라는 이름씨(명사)와 ‘이랑’이라는 도움씨(조사)가 붙어서 된 말이다(알+이랑 = 알이랑). 그러므로 ‘알’과 ‘이랑’을 각각 따로 분리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우리 겨레는 잡신과 구별되는 유일신의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우리말 어원사전).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소리바꿈 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아랍 기독교도들은 성경의 유일신 하느님을 '알라'라고 아랍어 성경책에 표기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가’ ‘~이’ ‘~는’ ‘~이랑’ 등과 같은 ‘토씨’는 뜻과 소리가 바뀌지 않으면서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 =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 = 갑순이와 함께, 벗이랑 = 벗과 함께).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원의(原意)이다. 아주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차병원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아리랑의 원의”라는 주제로 유석근 목사가 발제강의를 하고 있다.


   왜 ‘알’이 유일신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알’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겨레는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알’은 우주만물의 根源(근원)이며 始終(시종)이신 主宰主(주재주), 곧 유일신 하느님(God)을 의미하는 우리 배달겨레의 옛 말이다.

 

  고구려, 신라 그리고 가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卵生說話)가 있다. 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나왔다는 것,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는 것, 김수로왕이 알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은 모두 그들이 ‘한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다. 바로 이것이 난생설화의 진정한 의미이다. 

 


‘알’에서 나온 신라 시조 박혁거세

  

  난생설화의 주인공들이 말 그대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치한 생각이다. 실제로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렇게 파악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즉 천손(天孫)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난생설화는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알님(하느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하늘’이란 단어의 어원도 ‘한알’이다.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原)’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소리바꿈 되어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느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저명한 조직신학자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간). 즉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엘’은 ‘알’의 변음이다.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느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느님(알)을 아는 지식(앎)이 가장 큰 지식이다.

 

  16)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大卵=한알)을 뜻한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한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누군가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디로 돌아가신 것인가? ‘한알’ 나라로! 그리하여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민족’이 아닐 수 없다.  



‘알이랑민족’의 무덤 양식은 ‘한알’로서 우리 겨레 고유의 한알님(하느님) 신앙이 표현된 것.


  필자는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충분히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자, 여기에 논리적 비약이 있나? 논거가 빈약한 아전인수격 주장인가? 유 목사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나? 아리랑의 어원과 의미에 관한 필자의 학문적 견해에 이의가 있다면 근거를 제시하고 반박하라. 논박 없는 무조건적 비평은 졸열한 짓이다.


  그대가 어떤 학자가 발견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때에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먼저 그러한 결과를 도출한 이론적 근거들이 오류가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오류인지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즉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니다’ ‘틀렸다’ 하면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아리랑 찬송가론에 대한 필자의 주장에 시비를 거는 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옹졸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필자를 교묘하게 '이단'으로 조작하는 야비한 인간도 보인다.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한 바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라는 뜻이고(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에 나오는 그 ‘고개’란 우리의 먼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유석근 목사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 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한국인은 실로 수많은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서 동방으로 온 것이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가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만주 벌판이 연장된 땅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의 고향이다.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은 70% 이상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내려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의 조상은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북방, 특히 백두산과 바이칼(밝알)호에 있다.

한국인의 주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우리 조상들은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쉬지 않고 이동하다가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땅 끝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밝은 땅에 정착해 살게 된 백성이 우리 한국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가 사는 땅을 ‘밝달’이라고 했고, 이 밝은 땅에 사는 우리 겨레를 “밝달겨레”라 했다. “밝달겨레”의 이두문 음이 곧 “배달겨레”인 것이다. “밝달”과 “배달”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밝달의 ‘달’은 땅(地)이란 말인데, 그것은 곧 양달(陽達)이 양지요, 응달(陰達)이 음지요, 빗달(傾斜地)이 비스듬한 땅인 것이다. 그런고로 “배달겨레”란 “밝은 땅에 사는 겨레”라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겨레는 밝고 환한 것을 지극히 선호하여 의복도 밝고 환한 흰옷을 입고 살아 온 백의민족인 것이다. 우리 겨레의 백의 착용의 동기와 백의 숭상의 유래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흰옷 선호는 민족형성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것이다. 배달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느님과 함께'라는 일신 신앙으로 시작했다. 하느님은 밝고 환한 천국에 빛 가운데 계시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다.


  고대 한국인은 천지만물의 주재자가 되시는 분이 빛 가운데 계시는 창조주 한알님(하느님)이시라고 알고 자기네들은 그 하느님의 자손 곧 '천손민족'이라고 믿었는데,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밝고 환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이다.


  하느님은 빛이시다(요일 1:5). 그래서 하느님 백성인 우리 겨레는 빛의 옷인 흰옷을 즐겨 입은 '백의민족'인 것이며, 사는 땅도 빛이 시작되는 동방의 땅 끝 ‘밝달’에 자리 잡은 '배달민족'인 것이다.



↑ 6.25사변 직후인 1950년대 초 대구 소시장의 풍경.

이 사진을 찍은 미국인 Adam은 한국인이 모두 검은 머리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흰 색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가장 밝은 색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 믿었던 우리 민족은 흰옷을 숭상해서 일상복은 물론이고 상복으로도 밝고 환한 흰옷을 널리 입었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흰옷은 하느님(하나님) 백성의 표지이다(계 7:9,14; 계 19:7~8; 전 9:8). 지혜 있는 자는 열매로 나무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밝달)를 찾아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즉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집단적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는 것이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상실한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 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실로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과 함께 알이랑 - 왕성교회 성가대 찬양 동영상 보기 >

 

< 오페라타 길선주 중에서 강명숙 교수의 독창과 합창 알이랑 듣기 >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무형인류문화유산’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만이 아닌 지구촌 문화유산이다. 아리랑은 7천만 한민족의 노래만이 아니라 70억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같이 불러야 할 인류의 노래인 것이다.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써야 할 당위성 및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헤리티지아카데미 / 이화여대 바른역사연구회 주최 “한국 기독교 역사 바로잡기” 특강

(이화여대 포스코관/ 2012-05-22)

주제: “아리랑의 비밀과 한민족 고유의 유일신 신앙”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래서 위험천만한 사상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아리랑의 의미와 태동배경에 관한 하나의 학문적 이론인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국교회의 아주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필자가 제시한 아리랑 찬송가론을 기존의 아리랑에 대한 어떤 해석들보다 설득력이 있는 학적 이론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필자는 <알이랑민족> 244~282쪽에서 우리 조상들이 섬긴 ‘한알님’(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이 성경에 계시된 유일신 하느님(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음을 입증해 주는 문헌상의 자료들까지 상세히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두 개의 장으로 책에 수록된 그 원고들은 본 사이트 「알이랑 코리아」에도 전부 게시해 두었다. 아래에 링크한 제목들을 클릭하면 읽을 수 있다.


< 성경의 하느님과 일치하는 민족경전의 유일신 하느님 사상 >


<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한민족 고유의 삼위일체 하느님 사상 >

 

< 고대 한국인의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에 관해 기록한 ‘표훈’의 정체 >

 

< 셈 ․ 수메르 ․ 코리아 >


  이제 한국인은 잃어버린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알이랑이 찬송가라는 해석에 시비를 거는 자들은 필자의 저서를 한 번 읽어보지도 않고서 편견에 사로잡혀 논박 없는 비평을 옹졸하게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제발 공부좀 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기 바란다.


  앞서 고찰했듯이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느님 중심사상"이며 "신본주의 정신"이다. 이 숭고한 '알이랑' 정신이 바로 한국인의 '뿌리사상'이요 '근본이념'인 것이다. '알이랑'은 한민족의 원형과 정체성을 알려 준다.


  우리 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즉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거룩한 백성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필자가 단언컨데 한국 백성이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예수원 유석근 목사 <알이랑민족> 특강 (2009-12-23)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어라


  전통민요 아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누구보다 국어학자, 그리고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는 음대 교수들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15년 전 이화여대 음대학장인 주영자 교수로부터 ‘알이랑’에 대해 직접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대를 방문, 음대교수들만 모인 자리에서 아리랑의 시원과 원의에 대해 특강을 한 적이 있다. 주영자 교수는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며, 그 뜻은 ‘하느님과 함께’라는 필자의 해석을 인문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한 타당한 이론이라고 확언했다.


  침례신학대학의 원어교수를 역임한 김선기 목사(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장)는 <알이랑민족>의 추천서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참으로 놀랍고 획기적인 책이다.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위시한 민족사관 학자들의 한국사를 오랫동안 탐구해 오던 나에게

유석근 목사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은

모든 것들을 단번에 정리시켜 주는 통쾌한 저서였다.”


  안준배 목사(문화평론가, 기독교문화예술원장)는 <알이랑민족> 추천의 글에서 아래와 같이 격찬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신학적 해석은

기독교가 가졌던 타종교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를 근원적으로 해소한 것이다.

더욱이 다가올 통일의 시대에 맞춰

남북의 동질감 형성의 주제가인 아리랑에 대한 신학적 성과는

통일신학을 배양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장신대 미주지역 총동문회장을 역임한 한화영 박사(트리니티신학대학교 대학원장)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알이랑민족>은 한국인이 또 하나의 성민(聖民)임을

‘외증(外證)’과 ‘내증(內證)’으로 증명한 역저이다.

....외증으로는 역사적, 지리학적, 고고학적, 과학적인 사실을

연역적이고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불러온 민족의 노래 ‘알이랑’에

‘하느님과 함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은 ‘외증(外證)’의 하나이다.


  성막론의 권위자 강문호 목사(갈보리교회)는 CTS에서 "아리랑은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는 제목으로 연속 방송 특강을 했다. CT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시청할 수 있다. 본 사이트에도 올려져 있다.

 

< 강문호(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님의 CTS 알이랑 특강 >

 

  아미(AMI) 선교회의 황용현 목사도 필자가 <알이랑민족> 에서 역설한 아리랑 찬송가론을 가르치신다.


< (동영상) 욕단의 후예들- 황용현 목사(AMI 선교회) >


  필자의 은사이신 신성종 교수(전 총신대 신학대학원장, 전 충현교회 담임)는 유석근 목사의 아리랑 찬송가론에 대해서 자신은 견해가 일치한다고 했다.

 

< 알이랑 찬송가론에 대한 신성종 교수의 평가 (동영상) >


  이단사이비 문제를 집중 연구하는 ‘아레오바고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단종파를 다루는 월간지 「현대종교」의 편집위원과 편집장을 장기간 역임한 이영호 목사가 대표로 있다. 그는 지금도 ‘사이비종교 피해대책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아레오바고 사람들’을 이끌면서 이단사이비집단을 척결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영호 목사는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에 대해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밝혀주는 도서로서 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책”이라고 평가했다. (필자는 ‘아레오바고 사람들’ 모임에 초청을 받아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뜻이 왜 “하느님과 함께”라고 해석되는지 강의도 했다. 또한 우리 민족이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후손으로 간주되는 근거들을 ‘내증(內證)’과 ‘외증(外證)’을 들어서 발표하고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진 바 있다.)


  이 모든 분들은 그 누보다 건실한 지성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하느님(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런 분들을 전부 소개하려면 지면이 부족하다. 실은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다. 결국은 팩트와 진실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온다!”


  그렇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필자가 하느님(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내증(특별계시)과 외증(일반계시)에 근거해 선포하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부르심에 대한 메시지도 아멘으로 응답하며 따르는 성도들이 전국적으로 아주 많다. 그러한 현자들의 수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들 가운데서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왜? "알이랑민족"의 메시지는 허구가 아닌 역사적 진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사실로 존재하는 것들로서 진리와 한 짝이다.


  마침내 신실하신 하느님(하나님)은 지난 17일 입법부의 중심인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아리랑 아카데미"를 개최하여 아리랑의 비밀을 선포하게 하셨다. 좌석은 거의 찼고 강의 중에는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주님은 당신의 일을 신실한 성도들을 통해 이루고 계신다.


☞→▶ < 아리랑 아카데미 화보 >


↑ 17일(화)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아리랑 아카데미.

유석근 목사가 '아리랑의 시원과 원의'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어떤 새로운 이론에 반대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필자가 확인해 보면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라는 이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들은 정윤석이 작성한 기사 처럼 필자를 이단으로 조작하려는 야비한 목적을 깔고서 사실을 왜곡 날조한 글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논박 없는 무조건적 비평들 뿐이다. 필자는 편협하고 옹졸한 자들의 그런 무가치한 잡설들로 인해 조금도 흔들리거니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도산의 명언처럼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온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리랑은 찬송가였다는 필자의 해석에 견해를 같이 하는 기독 지성인들과 학자들, 저명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국내외에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그들의 수는 연부년 증가일로에 있다. 이번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아리랑 아카데미"는 객석을 거의 다 채웠고 청중들의 반응도 아주 뜨거웠다. 애석하지만 듣는 것이 둔한 사람들은 항상 있다. 허나 개는 짖어도 달리는 기차는 서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들어라!"


관련기사: < '아리랑'은 '찬송가'였다 >


< 하나님 VS. 하느님 >


< 아리랑, 미국 찬송가 229장 (동영상) >


< 한국인은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후손 >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cafe.daum.net/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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