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라
생수의 강
2009. 4. 28. 13:40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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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1~7 :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라 성경에서 가장 탁월한 학자요 목회자요 선교사 한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이구동성으로 사도 바울을 택할 것입니다. 그는 원래 예수님을 싫어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다메섹 길 위에서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은 당황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빛 가운데서 만난 사울은 그 후 3일 동안 시력을 잃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 훈련을 받았고, 이후에 그는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바나바와 더불어 안디옥까지 가서 교회를 개척합니다. 사도 바울 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것이 인간의 것이고 땅이 것이라면 얼마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날이 갈수록, 세월이 갈수록, 고난이 깊을수록, 역경이 몰아칠수록, 위기가 올수록 계속 타오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울 되게 했던 그 놀라운 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문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개척한 이후 중앙아시아로 떠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됩니다. 전도여행 후에 또 성령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합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에게해를 건너 로마까지 갑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 대한 목마름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가보지도 않은 서바나의 꿈을 꿉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울 속에 꺼지지 않은 이 불입니다. 굶어도, 잠을 자지 못해도, 버림을 받아도, 기절을 해도 꺼지지 않는 불의 정체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불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체험할 수만 있다면, 멈출 수 없는 이 힘을 발견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권력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바울에게 임했던 불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고 싶은 마음,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 마음, 병들어도 다시 일어나고, 가난해도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오, 주여 영적 능력과 불을 우리에게 허락하옵소서.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다시 에베소를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만나자 마자 사도 바울은 1, 2차 전도여행에서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합니다. 1,2절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을 왜 했을까요? 그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또 질문을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으심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면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요즘, 교회 체질 개선과 한국교회의 부흥을 생각하면서 바로 이 질문을 깊이 묵상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이 피를 흘려 사셨습니다. 교회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교회는 부흥하고 어떤 교회는 부흥하지 않습니까? 왜 어떤 교회는 죽음과 절망 속에서도 기적을 만들어 내고, 어떤 교회는 좋은 환경 속에서도 아무 변화가 없습니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 길 위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단순히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만났습니다. 이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성적으로, 의지적으로 믿어 영접한 사람과 예수의 영이 자기 몸을 통과한 사람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빛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의 영을 체험한 사건이요, 성령 세례를 받은 사건이요, 성령의 불이 그를 통과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과 다른 영적 체험입니다. 왜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까? 영적 변덕이 심합니까? 간단합니다. 예수의 보혈을 통과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 경험이 없거나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으로, 전통적으로, 습관적으로 찬송하고, 봉사하고, 성가대 하고, 가르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영적 수준에 들어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그것을 견뎌낼 힘이 없습니다. 성령이 교회 부흥의 열쇠 사도 바울은 성령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합니다.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아 눈을 뜹니다. 사도 바울은 관념적으로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의 실체를 경험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든지, 죽음이 그를 몰아치든지, 어떤 위기를 만나든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믿음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후로 달라집니다. 고난, 역경을 만나지만 의심하지 않습니다. 실수도 하고 인간의 연약함도 보이지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큰교회를 갖고있는 목사님은 이북에서 피난 나올 때 성경책 하나를 들고 탈출한 부모님의 신앙을 따라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새벽기도회에 가고 하루에 두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분이 왜 예수를 몰랐겠습니까? 교회가 그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목사님은 말하기를 그래도 자기는 변하지 않았고. 교회에 다니고 있었을 뿐이었고. 찬송가를 불렀을 뿐이요, 예배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을 뿐이었답니다. 이유는 예수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시작할 무렵에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살아있는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마에 피를 흘리신 예수님, 두 손에 못 자국이 있는 예수님, 흰 옷을 입고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만난 것은 다릅니다. 그후 목회는 엄청나게 부흥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짐 그래함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간증과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를 잘 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사까지 되었고 설교도 잘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떤 청년을 만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청년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자신에게 없는 평안과 내적 능력과 기쁨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고민했습니다. “왜 나에게는 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없을까?” 목사였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이야기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설교 준비를 하는데 성령이 임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눈물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성화를 경험했습니다. 영적으로 예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후로 짐 그래함 목사님은 전혀 다른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설교하면 귀신이 떠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교회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성령받은 교회와 받지 않은 교회는 다릅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의 열쇠라고 믿습니다. 개인의 축복의 열쇠라고 믿습니다. 사역의 열쇠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와 능력으로 섬겨야 합니다. 나이, 신앙경력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4~16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알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했습니다. 드디어 약속의 성령님이 오순절에 기도하는 120명에게 불처럼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성령님이 그 사람들을 만졌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여러분을 만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육체, 영, 생각,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살 길 ‘말씀과 성령’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올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전과 후는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삶이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건물, 사람, 프로그램은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부흥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 받은 후의 이야기입니다. 성령 받지 못한 설교, 찬양, 기도, 돈, 프로그램, 건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크고 화려한 것이 많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교회도, 예수님의 생애도 성령의 터치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경학자 아볼로는 성경에 대해 박식하고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성령에 대한 깊은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가르쳤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은데 모릅니다. 성령 받은 교회와 받지 않는 교회는 다릅니다. 여러분이 왜 그렇게 고민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스스로 불 속에도 들어가고 순교도 하는데 뭐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다니엘을 보십시오. 요셉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땅도, 집도, 돈도, 사람도 아닙니다. 성령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이성과 지식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받아 피와 살을 먹고 마셔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부흥하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사람도 많고 건물도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미래는 무엇입니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처럼 부흥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적 경각심을 가지십시오. 자기반성을 하십시오. 성공에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나태하게 현실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어느 날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무엇입니까? 만약 그 일을 제게 묻는다면 한국교회가 살 길은 ‘말씀’과 ‘성령’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로그램, 축제, 돈, 권력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 능력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성령에게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누구도 성령님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경에 대해 가르쳐 주니까 그냥 들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성경에 대해 관심이 생기면서 주옥같은 명구로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다음에 비이성적인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러다 제가 성령을 체험하고 성경을 읽었을 때 영생, 십자가, 거듭남, 성령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에 체험한 것은 능력입니다.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하나씩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성경을 보니 비전이 생겼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비전을 나의 것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구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 3, 4절입니다.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서 말하되 내 귀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용서와 은혜의 세례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회개에서 시작해 용서와 은혜로 들어갑니다. 용서와 은혜를 외면하고 회개만 강조한다면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성령님에 대한 다양하고 포괄적인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영적 보물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지혜의 말씀이 있기 바랍니다.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교회 부흥의 열쇠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프로그램, 자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님의 은사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구할수록 허무하고 피곤하고 탈진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임할 때 교회는 변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납니다.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충만합니다. 교회 부흥의 비결은 성령 세례에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 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에게 있다면, 교회에 있다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교회 부흥의 비결은 이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하십니까? 성령님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성령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에서 성령님을 구한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여러분의 교회가 성령 앞에 무릎 꿇고 금식한 지가 언제입니까?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분을 사모하고 초청하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부흥은 잔재주가 아닙니다. 기술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임재, 다스림입니다. 그곳에 찬양, 예배, 회복, 치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강조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구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도 아니요, 쉼도 아니요, 돈도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 말씀의 능력입니다. 교회의 중보자가 되십시오 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한국교회에 성령세례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교회가 성령 세례를 받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모든 목회자와 선교사와 설교자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모든 평신도 사역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저는 여러분이 방언, 예언, 통역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은사, 믿음의 은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성령 세례를 받고 예언과 방언이 일어났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을 주옵소서.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인치심을 주옵소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고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고 귀신이 떠나게 하시고 악한 세력이 떠나게 하옵시고 저주와 질병이 떠나게 하옵소서. 7절입니다.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열 두 사람입니다. 소수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기억하십시오. 숫자가 적다고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본적인 숫자는 12입니다. 열 두 명이면 충분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단지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숫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열 두 명이었지만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오 하나님. 이 밤에 한국교회에 성령을 부으소서. 한국교회가 방언도 하도 예언도 하게 하소서. 이 민족에게 성령을 부으소서. 분노하고 비판하고 다투고 저주받은 것 같이 사는 백성을 회복시켜 주시고 거듭나게 하소서. 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이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까? 무릎을 꿇으십시오. 가난한 마음으로, 목마른 사슴처럼 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의 교회를 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가정을 살릴줄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의 중보자가 되십시오. 가정의 중보자가 되십시오. 진정한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요 성령의 부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