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누가 단군을 신화라고 했는가?(2)
누가 단군을 신화라고 했는가?(2)
일제 강점기에 단군을 말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 인물이 일본인 어용 식민사가인 ‘이마니시류’(今西龍, 1875~1932)이었다. 그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조선사편수회」의 수괴였던 자인데, “사설(史說)은 사료(史料)가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역사적 인물인 단군을 신화상의 존재로 뒤집어 놓은 자였다.
그는 단군을 부정하기 위하여 「삼국사기」이외의 것은 한국의 고대 역사 자료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삼국사기」이외의 사서(史書)는 모두 사서가 아니라 ‘사설(史說)’, 즉 위사(僞史)라고 단정하였다. 특히「삼국유사」<고조선조>에 나오는 단군 기사는 신화라고 못을 박았다.
단군 부정의 원흉(元兇)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마니시’는 1930년 8월 22일 조선 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조선사편수회」제4차 위원회에서 난데없이 터무니없는 사설론(史說論)을 들고 나와 강변하기를,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은 사료적 가치를 조금도 인정할 수 없는 ‘사설(史說)’이라면서, 단군은 단지 신화의 인물이며,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므로 단군은 없었다고 했다. 이렇게 단군을 극구 부정한 인물들은 ‘이마니시’를 비롯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다.
그는 단군고(檀君考)라는 학위 논문을 발표한 지 2년 뒤인 1932년에 불과 나이 57세에 급사했다. 그의 이름은 금서룡(今西龍)이다. 풀이하면 ‘지금(今) 서쪽에 있는(西) 마귀(龍)’ 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용은 마귀를 상징한다(계 20:2). 동쪽에 있는 자기 나라 일본을 떠나 지금 서쪽 조선으로 와서 악한 마귀 짓을 하고 있으니 이름 그대로 금서룡(今西龍)이다. 그래서 그가 급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게다. 악의에 차서 마귀 짓 하면 천벌 받는다.
당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단군 조선이 「조선사」에 수록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이마니시’를 위시한 일제 어용사가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된 「조선사」제1편 제1권은 신라 시조 혁거세 원년(B.C 57년)부터 시작된다. 그 해가 단기로 2277년이니까 일제 식민사가들은 단군조선(고조선)이래 4천여 년의 장구한 조선 역사를 2천년 이상이나 날강도 같이 죽여 놓은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역사가들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의 단군 말살과 한국사 왜곡
‘이마니시’는 또 주장하기를, 삼국 이전의 우리 역사가 간혹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나오는데, 이들 기록의 많은 부분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만주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한국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사에 속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 조선의 역사는 물론 부여와 삼한의 역사까지도 모두 한국사가 아니라 소위 ‘만주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곧 악명 높은 만선사관(滿鮮史觀)이었다. 금서룡의 단군 말살론은 일제 말기에 대륙 침략을 위한 만선사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8․15 광복 후의 한국사학에 영향을 끼쳐 단군신화론의 뿌리가 되고 말았다.
일제의 단군 말살론과 한국사 왜곡으로 인해 우리 민족사는 오천년사에서 이천년사로 단축되고 민족의 역사적 강역마저 좁은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게다가 우리는 광복 후의 국토 분단과 6․25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상고사와 만주 땅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잃고 말았다. 만주 땅에서 벌어졌던 우리 역사는 모두 우리 민족과 무관한 남의 나라의 역사, 즉 중국사로 여기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눈 깜박하는 사이에 역사를 도난당하고 만 것인데, 도난당하고도 도난당한 사실을 모르는 그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광복 50년이 넘은 오늘에 이르도록 우리는 역사의 도난 사실을 모르고 지내왔고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려 도난당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왜곡된 역사관에 맞서 이미 우리 선배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저들의 음모를 간파하고 상고사를 되찾아 반도사관을 극복하려는 투쟁을 시작했었다. 단군 문제야말로 민족사학 발전의 촉발제가 되었던 것이다.
일제 때의 민족사학자로 손꼽히는 분으로 백암 박은식, 무원 김교헌, 단재 신재호, 그리고 위당 정인보를 들 수 있으며, 거기다 더 추가한다면 육당 최남선, 무능거사 이능화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상고사를 되찾기 위한 역사 연구에 몰두한 분들이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제 사학자에 암살당한 단군을 살려내기 위한 투쟁에 나섰으나 조선사편수회에 관여한 일부 사학자들의 묵비권 행사로 인하여 금서룡의 사이비 주장이 광복 후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고야 말았다. 역사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일제 35년의 국난을 통해 남겨진 가장 불행했던 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단군이 말살 당했다는 사실보다도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가 8․15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이다.
-계 속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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