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이르는 열매는 예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이 열매이다.
4. 생명의 열매는 잣나무로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호14:8)
우리는 예수로만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나님은 잣나무 같으니 푸른 잣나무, 하나님은 무성한 나무 같으므로 하나님으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예수로 열매 맺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만 예수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다음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열매를 어떻게 하면 맺을 수 있다고 했는가? 붙어 있으면 맺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열매를 맺으려고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으나 버려진 가지는 혼자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된다. 많은 사람들은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지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가지는 붙어 있으면 된다.
열매 맺는 책임은 나무에게 있는 것이지 가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책임져서 뿌리를 통해 열매에 필요한 영양분을 올려보내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가지는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다.
자기가 가지 되고 싶어 된 가지가 어디 있는가? 나무가 자신을 위하여 가지를 만들고 열매도 맺게 하는 것이지 그러므로 가지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고 오직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된다.
아무리 가지가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소용없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소용없다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복음 15장을 읽으면서 열매를 맺어야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요한복음 15장은 열매를 말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가지와 나무가 하나인 것 같이 예수님과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열매가 맺어지려면 예수와 하나 되는 길밖에 없다. 그럼 예수와 하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5. 열매 맺는 조건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우리가 예수와 하나 되려면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복음의 말씀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인가?. “그 이름을 믿는 것”이 영접이라 했다. 그 이름을 어떻게 믿는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100% 사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어지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요,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저절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하는 열매는 행위의 열매가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열매요, 외적인 열매가 아니라 내적인 열매이다. 영접이란 열매가 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처녀가 남자를 영접하면 아들이라는 귀한 열매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러나 처녀가 남자를 아무리 좋아해도 영접하지 않으면 생명을 탄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다르다. 여자가 그 사람의 열매를 얻으려면 반드시 영접해야 한다. 착한 행실로는 외적인 열매밖에 맺을 수 없으며 남자를 영접해야만 내적 열매인 자녀를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구하는 참 열매가 무엇인가. 그것은 나무에 붙어 있어야 맺어지는 열매이며, 영접해야 맺어지는 내적인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에 붙어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한 것이다.
영접해서 맺어지는 것이 행위의 열매인가? 내적인 생명의 열매인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였으니 행위의 열매가 아니고 내적인 생명의 열매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다음절인 요한복음 1장 13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다.
“육정으로나 혈통으로”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열매가 나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가? 아니다. 절대로 될 수 없다. 이것은 처녀가 자기의 노력으로 아들을 낳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적 행위가 좋지 못할지라도 남자를 받아들였다면 자기의 노력이 아니라 남자로 인해 생명의 열매가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생명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열매가 율법을 잘 지켜 얻어진 경건한 열매인가? 아니면 영접해서 생겨나는 생명의 탄생인가? 외적인 행위의 열매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15:50) 하나님으로부터 생긴 새로운 생명이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에 이르는 열매가 어떻게 맺어지는가? 붙어 있으면 된다. 남자 없이 홀로 있는 처녀가 재산을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는가?
홀로 있는 처녀는 법을 잘 지켜 세상에서 최고의 의인이요, 성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자녀가 없기 때문에 후손에게 재산을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 의롭게 살았다 할지라도 자녀가 없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아무리 재산을 아끼고 사랑하고 사모했다 할지라도 죽으면 그 모든 재산은 타인이 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할지라도 죽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 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지도 못하고 율법을 잘 지킨 행위의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남자를 영접하여 자녀가 탄생했으면 그는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의 생명의 열매인 아들은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다.
천국의 유업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행위가 아무리 거룩하고 흠이 없을지라도 그가 죽는다면 행위의 열매로는 하늘의 기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부족하게 살고 행위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예수를 영접하여 예수의 생명이 자기 속에 탄생했다면 육신은 죽어 흙이 되어도 예수로부터 받은 영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 유업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과 하나 되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여자가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남자를 떠나서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마태복음 7장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자. 마태복음 7장에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에 대하여 또는 좋은 열매와 못된 열매에 대하여 나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6-19)
사람들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조금만 불결하면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어! 열매를 보니까 이단이야’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깨끗해야만 아름다운 열매인줄 알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행위가 바르지 못하면 열매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6. 열매는 나무가 원인
좋은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열매가 무슨 열매냐 하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무슨 나무냐 하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나무가 못된 나무이면 아무리 좋은 열매를 맺으려 해도 맺을 수 없고 반면에 좋은 나무도 절대 못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무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외적인 열매를 생각하여 행위가 좋지 못하면 열매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에서는 외적인 행위의 열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의 열매를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나무가 좋아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는 그 좋은 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행실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가 없으니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바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열매에 대한 말씀을 하기 전에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이 거짓 선지자가 겉이 좋은 자인가? 속이 좋은 자인가? 겉이 좋은 자이다. 그러므로 겉이 좋다 하여 속지 말라! 겉이 좋다 해서 속이 좋은 것은 아니다. 겉이 깨끗하다 해서 예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율법을 잘 지킨다 해서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 외모가 깨끗하고 흠없이 의롭다 할지라도 속에 예수가 없으면 이리라는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 할지라도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했으면 그는 사단의 대리자요, 멸망의 자식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분명히 양의 옷을 입고 나왔다고 했다. 양의 옷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진실하게 율법을 잘 지키는 교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어린양이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하며 율법을 잘 지켜 외부를 단장했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볼 때 양 (참된 신앙인) 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외적으로 볼 때 아무리 양과 같이 보일지라도 속에 예수가 없으면 그는 양이 아니요, 이리다.
그러므로 외적인 행위는 아무리 좋아도 내적으로 생명을 얻지 못했으면 그 사람은 이단이요, 이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가 나의 죄를 100% 짊어지신 구세주라고 영접할 때만 가능하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3:2-6)
성령을 받는 일은 믿음을 통해서이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 다 믿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 치고 예수 안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를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이다. 99%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100% 믿어야 한다.
100%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한 속죄를 100% 믿어야 한다. 예수가 죄를 사했다고 하면서도 현재위치까지의 속죄만 믿는다. 예수님의 속죄는 우리의 모든 죄를 1%도 남기지 않고 다 사하셨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죄인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죄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모든 죄를 사하여 준 것으로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영접이요, 이렇게 영접했을 때 우리 속에는 예수의 영이 거하므로 예수의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겉만 양의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요, 속이 진짜 양이 되는 것이다. 겉이 아무리 깨끗해도 예수가 없을 수 있고 겉은 더러워도 속에는 예수가 있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속에 열매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있는 교인들 중 겉은 좋은데 예수가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겉이 좋은 열매를 논한다면 목사보다 산중에 사는 중이 더 낫다. 그렇지만 중은 겉은 깨끗하나 속에는 예수가 없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자이다.
7. 외적 행동이 없어도 좋은 열매
마태복음 7장에는 겉만 양의 옷을 입었지 속은 이리다. 예수님이 이 때 하신 말씀은 열매는 나무부터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한 마디로 나무의 종자가 어떤 종자냐 그러나 같은 종자가 된다 하여도 열매가 똑같이 열릴 수는 없다. 똑같은 감나무라도 어떤 감나무에는 감이 많이 열리고 어떤 감나무에는 적게 열리며, 어떤 감나무에는 감이 탐스럽게 열렸으나 어떤 감나무에는 상품 가치가 없게 열린다. 그러나 종자는 똑같다.
시골에서 감나무를 많이 접해 보면 어떤 해는 많이 열리고 어떤 해는 거의 열리지 않아 해걸이를 하는 나무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열렸든지 그것은 상관없이 모두 감이요, 감나무인 것이다. 이 나무에 열매가 전혀 없다면 무슨 나무인가? 열매가 전혀 없어도 감나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똑같이 좋은 열매가 열리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각각 그 열매는 다른 것이다. 좋은 나무라고 해서 무화과나무에서 포도를 따든지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다. 이 말은 외적인 열매가 똑같이 좋은 열매라도 그 종류는 다르다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위의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인가? 다름 아닌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좋은 나무는 무엇인가? 그 좋은 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에게 붙어 있는 가지가 되었어도 어떤 부분은 열매가 많이 맺히고 어떤 가지는 열매가 적게 맺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인 열매가 없을지라도 예수에게 붙어 있다면 그는 좋은 열매인 것이다.
단지 많이 맺으면 영광을 많이 받겠고 적게 맺으면 적게 영광을 받게 된다. 그러나 양쪽 모두 예수에게 속했기 때문에 맺는 열매는 예수의 열매다. 외적인 열매가 적게 맺혔다고 해서 또는 열매가 상품 가치가 없게 맺혀졌다 해서 예수의 열매가 사단의 열매가 될 수는 없다.
8. 행위를 보고 종류를 구별 못함
흑인이 행위의 열매가 좋다 해서 백인을 낳을 수 없고 백인이 행위의 열매가 나쁘다 해서 흑인을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종자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요, 외적으로 지키는 율법과 상관없이 종자는 똑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싶은 것은 예수에게 속한 자만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며, 예수의 열매는 내적인 열매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율법적인 열매라면 모순점이 너무 많다.
한국 사람은 백의 민족이라 옛날부터 선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민족은 단일 민족이다. 그렇다면 한국 민족은 나무가 좋은 나무라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 아닌가? 좋은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 율법적인 외적 열매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한국 사람들은 좋은 종자이므로 행위가 깨끗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자는 좋은 종자인데 열매는 못된 열매가 너무 많다. 지존파는 한국 사람이 아닌가? 날마다 떠드는 살인, 강도, 강간, 절도, 사기 이 모든 못된 열매는 도대체 어떤 종자의 나무들인가? 역시 이것도 모두 좋은 나무, 백의 민족에서 맺어진 못된 열매이다.
또한 흑인들은 피부가 까만 종자이므로 일부의 사람들은 그들을 좋지 않게 여긴다. 그러면 흑인들은 나무가 좋지 않으므로 못된 열매만 맺고 있는가? 아니다. 정의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 남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얼마나 좋은 열매를 맺은 사람이 많은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 나라 사람보다 좋은 열매를 맺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그들은 흑인이다. 율법적인 열매가 열매라면 그들이 백인이 되야 한다. 율법적인 것이 열매라면 예수님의 열매에 대한 이론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는 외적인 열매가 아니요, 내적인 열매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하는 말은 그들의 행동으로 그들을 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 종류를 보고 그들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백인 자녀를 보면 “저것은 백인 종자다”하고 흑인을 보면 “저것은 종자가 흑인이다”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저것은 종자가 한국 사람이라”한다. 백인을 볼 때 그 아버지가 백인이다, 흑인을 볼 때 그 아버지가 흑인이다, 황인을 볼 때 그 아버지가 황인이다. 그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열매를 보고 그 종자를 알 수 있는 것은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 낳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구에게서 낳았느냐가 그 열매이지 행위가 그 열매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지만 외적인 열매는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들의 생애가 모두 일치될 수는 없는 것이요, 거듭난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거듭난 사람이다 아니다 판단할 수는 없으며 행동을 보고 이단이다 아니다 판단할 수 없다. 절대로 거듭난 사람의 행동이 똑같을 수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의 행동이 똑같을 수 없다면 그 행동으로 나무를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기준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이다.
다음호에 계속
성경이 말하는 열매의 참뜻을 더자세하게 다음호에서 살펴보다.
서울총회신학 김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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